Don't look back into the sun / The Libertines

같은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같은 시간/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사실 누구도 동일 인물이 아니니까, 이런 경우는 '많은' 정도가 아니라 늘 그렇다고 봐야겠지.  
한때 다정했던 애인들이, 단란한 시간을 보냈던 가족들이, 함께 학창시절을 겪었던 친구들이 같은 일을 반추할 때 반대되는 감정을 느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나와 내 친구는 똑같이 서울에서 자라고 같은 학교로 진학했지만 서로 관심사가 달랐기에 한 시대를 서로 다르게 기억한다.
그에게 중고등학교 시절은 젝키와 HOT '오빠들'의 기억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듯하다. 나는 젝키 멤버 이름도 모른다.
내 중고등학교 시절은 오히려 서울 코믹의 기억이 선명하다(쿨럭)... 그는 서코가 뭔지 모른다(쿨럭). 
개개인의 관심사라는 것은 가끔 엄청나게 큰 걸 못 보게끔 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사건을 아예 모르고 그 시절을 지났다가 추후에 알게 되기도 한다. 

이런 일반론에 가까운 썰을 길게 푸는 이유는 오늘 바로 같은 경험을 해서다.
밤새 보고서를 쓰면서 넷플릭스에 새로 런칭된 영드 하나를 리스닝 용도로 귀에 걸어놓고 계속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제목은 <The Inbetweeners>. 영국 또라이 청소년 드라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드는 E4 작품인데, 내용은 그닥 임팩트 없지만 그냥 소년들의 영국 발음을 노동요 대용으로 쓸 생각에 무념무상으로 듣고 있었다. 그런데 Pilot 에피소드가 끝나면서 엔딩곡이 나오는 게 엄청 좋은 거다. 뭐지? 이 노래? Don't look back into the sun...

첫 마디가 곧 제목이었다. 밴드는 리버틴즈. 

활동 시기는 2002~2004. 응? 학생일 때다. 이때 열심히 음악 서치하던 시절인데... 리버틴즈 왜 몰랐지. 
심지어 넥스트 오아시스? 오아시스 계열 밴드 엄청 좋아하던 시절인데 정말 왜 몰랐지? 
피트 도허티? 예전에 케이트 모스 덕질(?)할 때 그녀의 애인으로 검색 한 번 해봤던 사람이다. 보컬이네;; 리버틴즈 노래는 한 번도 안 들어보고 보컬만 익숙했군. 

그랬다. 그들이 브릿락의 기세를 몰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마약을 하고, 신보를 내고, 스캔들을 뿌리고, 청춘을 불태우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얻어가는 동안 나는 '몰랐다'. 그 2002~2004 사이에 나는 방학을 활용해 동유럽 여행을 했고, 한 근사한 투자회사 인턴 제의를 받았지만 따분할 거라는 생각에 거절했으며 문라이즈 레이블의 전자양 노래를 들었고 학관에서 가끔 호사를 누린답시고 2,500원짜리 메뉴B를 먹었다. 그리고 숙제를 했으며 수업을 빠지고 중간/기말고사를 봤다. 

그리고 15년여가 흐른 뒤의 나는 나와 같은 동시대를 살았던(그것도 시끄럽게 살았던) 그들의 정보를 찾아본다. 
그러는 와중에도 보고서를 썼으며 Don't look back... 이 노래가 좋아서 밤새 한 15번은 반복 재생한 것 같다. 찾아보니 또다른 보컬 칼 바렛도 이 노래를 만들고 나서 너무 좋아서 잘 때도 들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사진을 찾아보니 너무 취향이다. 목소리도 좋고 스타일도 좋고... 십수 년의 덕질할 세월이 있었는데 이제서야 알았다니.

분명히 지금도 어디선가 내가 무척 좋아할 사건이 벌어지고 또 좋아할 사람이 좋아할 행동을 하고 있겠지만, 사람은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한 가지 일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분명히 나는 전부 다 인지하지 못하겠지. 그중 일부는 평생 인지하지 못한 채로 사라질 테고, 아마 우연히 10년 뒤에 이처럼 인지하는 일들이 생길 것이다. 
그런 시간의 갭이 너무 신기하고 또 애틋하다. 이미 죽고 없는 작가의 발자취를 뒤지는 게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조차도 알 수가 없어. 

P.S. 참고로 인비트위너스 주인공 학생 4명을 귀여운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기껏해야 90년대 중후반생이려나 하고) 알고보니 87년, 83년생;; 인비트위너스도 2008년 드라마로, 이제서야 넷플릭스에 풀린 거였다. 


by renoa | 2018/10/29 07:22 | non-fic。 | 트랙백

김씨네 편의점 外

1. 미지와의 조우

이번 말레이시아 출장이 급하게 잡혔을 때, 두려움에 떨었다. 어쩐지, 동남아는 무서운 곳이라 생각해서다. 
편견투성이 생각이라는 점 인정. 서로 개성이 다른 여러 개 국가를 한데 뭉뚱그려 '동남아'로 표현하는 오류를 범한 것도 인정.
하지만 일본/북미/유럽을 각 10회 남짓 가는 동안 동남아는 단 한 번도 안 가봤다. 미지의 세계는 두렵기 마련이라규...


Free image from pixabay

하필 비행기가 연착되어 자정 무렵에 착륙했다. 동남아 많은 국가에서 영업하는 Grab을 이용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Grab은 Uber와 동일한 BM이기 때문에 운전자들이 전문 택시기사가 아니다. 차와 시간이 있으면 누구나 Uber 운전자로 나서듯, Grab도 마찬가지. 검증 안 된 현지인이 납치해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오만 상상을 했다.

공항 - 숙소까지 약 60~70RM이면(막힘 없을 때 1시간 가량 타고 가는 거리인데, 우리 돈으로 2만원 이하) 갈 수 있는데 KLIA Express를 타고 굳이 KL Sentral(*Central이 아님)까지 간 것도 그 때문. 이제 Sentral 역 - 호텔까지만 가면 되는데, 차로 약 7분, 13RM 나오는 거리. 불안함에 떨며 그랩을 불렀더니...

두둥. 나타난 것은 실망스럽게도(?) 건실해 보이는 말레이인 청년이었다. 실제로 건실하게, 내비게이션을 따라 얌전히 운전해 주셨다. 내릴 때 15RM을 주자 2RM(600원 가량)을 거슬러줬다. (...) 그냥 됐다고 했다.

이후 약 2박3일간의 출장 기간 동안 알게 된 사실. 쿠알라룸푸르는 엄청 세련됐고 치안이 좋으며, 음식이 굉장히 맛있다. (동남아 음식 입맛에 안 맞을까봐 걱정했던 게 바보 같다... 서울에 온갖 나라 음식이 다 있는 것처럼 KL도 국제 도시라 모든 맛난 음식이 다 있다 + 현지음식, 태국인들이 많아 태국음식 퀄리티가 좋음)

검증해야 하는 것이 현지향(向) 화장품이라, 이틀간 몰 10개 돔. 쇼핑몰에서 매일 1만보씩 걸었지만 관광은 전혀 못함.

※ 돌아오는 길에 지인들 나눠주려고 해당 화장품 회사 제품을 대거 구매해 왔는데, 업체 대표님께서 해당 제품 매출이 공항에서 눈에 띄게 좋았다고 자랑하셨다. BG는 "잘못된 매출 예상은 재고의 지름길"이라며 얼른 이야기하라고 했지만, 너무 좋아하셔서 용기가 안 났음. 미미하니까. 나중에 회사 잘되면 농담 삼아 꺼내봐야지. "사실 그때 말이죠..."


                                 
2. 김씨네 편의점

최근 NETFLIX 덕분에(때문에?) 영상물과 조금 친숙해졌다. 그간 개인적으로 TEXT >>>>> VIDEO 의 선호도를 갖고 있어서 가끔씩 보는 영화를 제외하면 YOUTUBE 같은 일반 영상물이나 TV SERIES 보는 걸 매우 힘들어했는데, 침대가 있고, 거대 모니터가 있고 또 NETFLIX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드라마 볼 기회가 늘었다. NETFLIX는 자체제작 드라마 명가다. 소싱한 영화보다도 NETFLIX ORIGINALS가 일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드 보는 건 여전히 너무 힘들다. <미스터 션**>보다가 1화인가 2화만에 너무 신파라 접었다)

이 NETFLIX에, 완전 빠져들어 순식간에 정주행한 드라마가 있다. 미드 아니고 캐드. 이미 미드팬들은 다 아는 <Kim's Convenience>.  일명 김씨네 편의점.

Image from IMDB

꽤 웃기고 재밌다. 어색한 부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합격점이다. 한국계 이민 커뮤니티의 어떤 특징을 활용한 개그 센스가 상당히 뛰어난데, 그 난이도(?) 조절이 아주 예술이다.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해서, 해당 선의 너무 안쪽으로 넘어가면 한인들만 이해하고 너무 바깥쪽에서 맴돌면 겉돌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어려움이 있다. 이 작품은 그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한 것 같다(캐나다 내에서 전반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또 묘한 각도로 접근하면 자존심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데 영리하게 잘 비껴가면서 웃긴 느낌?
(전반적으로 거슬리는 부분은 거의 없었고, 딱 한 장면이 거슬렸는데 동해 vs. Sea of Japan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 부분 보면서 '음, 이건 국내/한인커뮤니티 시청자들이 좀 발끈하겠는데' 싶었다. 추후에 검색해보니 아니나다를까 해당 부분을 지적한 게시물이 상당수 있었다. 역시 문화라는 건 다루기 어려워... )

웃기고, 또 웃긴데 묘하게 짙은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것이 특징.

Reddit에 올라온 글들은 호평 일색이다. 극중 가족 4인의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고 니나 목사님, 중국계 친 사장님, 인도계 메타 사장님 캐릭터 너무 매력적이다. 메타 아저씨 너무 좋아. ㅎㅎ '아빠'랑 메타 아저씨가 가부장 대화 나누는 게 압권으로 웃김. 하지만 '진짜 편의점'을 했던 집안의 어느 한국계 미국인은 너무 마음 아파서 못 보겠다고도 했다.

의미가 큰 작품이다. 일단 첫 아시아계 주연(1인도 아니고 가족이!)으로 북미 시장에서 리얼 히트를 친 드라마라는 게 대단하다. 시즌 1~2를 성공적으로 찍었고 엄청난 떡밥이 던져진 상태로 시즌 3 방영이 예정되어 있다. 일단 Pilot 마치고 방영됐다는 것은 성공적 시그널, 시즌 3까지 제작되고 있다는 것은 더 성공적 시그널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장르가 '일상물'이라는 점. 그리고 한인 특성을 이용한 자학개그(?)가 꽤 많다는 점. 일상물이라는 건, 한인 특성이 살아있는 가족의 '있는 그대로'를 전달해도 재미있게 받아들여진다는 뜻이다. 자학개그는 일종의 자신감으로 해석된다. 진짜 바보한테 "야, 이 바보야!"하면 엄청 실례고 당사자도 서럽지만, 머리 좋은 사람이 "하하, 제가 좀 멍청해서요..."라고 하면 농담이 된다. 자학 '개그'를 친다는 건 그래서 일종의 여유가 있다는 의미.

아까 너무 좋아하는 씬 중 하나로 꼽았던 '아빠' & 메타 아저씨가 나와서 가부장 대화 하는 모습도 그래서 좋았다. 세대차/문화차는 유머로 극복해야지, 정색하고 덤비면 상호간에 진짜 슬퍼진다. 또 다른 사례는 1편 오프닝 장면. 김 사장이 가게에 게이 페스티벌 포스터 붙이는 걸 반대하자(동성애에 보수적인 한인 기성세대에 대한 오마쥬), 포스터를 붙이려는 게이가 "그거 차별"이라고 지적한다. 머쓱해진 김 사장. "내가 동성애자 차별을 하면 왜 우리 가게에 게이 디스카운트가 있겠어요?"
이런 화법은 정신적 여유 없이는 절대 나올 수가 없음.

Crazy Rich Asians가 흥행하고, NETFLIX ORIGINALS 중 재밌게 본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도 제법 인기를 끌었다(그래서 야쿠르트 동났다고 한다)... 확실히 무언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긴 하다. (Searching도 아주 신선하게 봄)

보이지 않는 차별이 가장 심한 업계 중 하나가 쇼비즈니스 업계가 아닐까?
사회는 PC한 메시지를 던지라고 가르치지만(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세요, 설마 너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보면 모든 올바름이 산산이 깨진다. 최대한 늘씬하며 아름다운 외모, 최상위(?라는 게 존재한다면)의 분위기를 풍겨야 대접받는 곳. White Washing이 빈번한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 엔터 업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은 법안 하나 통과된 것보다 더 큰 의미로 보인다. 제도의 변화보다 문화의 변화가 훨씬 파워풀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기 때문에.

솔직히 해리 포터의 Cho Chang은 너무 소모적 캐릭터(캐릭터 설정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였어. 차라리 루나 역할에 초 챙을 배치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아시안으로서 해보지만, 그건 조앤 롤링 마음이니까.


by renoa | 2018/10/12 19:32 | non-fic。 | 트랙백

외로운 싸움과 입시공부의 잔재

이번 명절에 좋아하게 된 필자가 있는데 바로 명문(!) '추석이란 무엇인가' (일명 이렇게 불리지만 실제 제목은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를 쓰신 이분.

글이 매력적이고 센스 넘치는 느낌이라 칼럼 역주행을 시작했는데 더 깊이 빠져버렸다. 위험… 처음에는 학교 다닐 때 몰랐던 것을 한탄하다가(청강이라도 해볼걸), 나중에는 학교 다닐 때 알지 못했던 것을 감사하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질풍노도의 시기였는데, 매력 넘치는 사람을 한 사람 더 찾아내면 학교 생활은 그만큼 더 피곤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대학 시절은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사람들에게 치이고 또 치였던 시기였다. 어디서 이렇게 매력적인 사람들이 개미굴 속 개미들처럼 한 군데 몰려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기이하고, 신비로운 사람들투성이였다(인간적이라고 말했지만, 물론 그중에 이성적으로 호감이 느껴졌던 사람도 없었던 것은 아님). 내가 매력을 느낀 사람 중에는 nerdy하지 않은 사람도, 굉장히 nerdy한 사람도 있는데 후자 중 한 명인 화학과 여자아이 한 명이 다음 주 귀국한다. 함께 실컷 놀아야지.


Free image from PEXELS


교수님의 글들은 전부 좋은데 그중에서 이 글의 이 부분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 첫째, 아무리 부부지만 상대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각자, 상대가 모르는 외로운 전투를 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배우자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외로운 싸움을 혼자 수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외로운 전투 중인 상대를 되도록이면 따뜻하게 대해주기 바랍니다.

둘째, 살다 보면 둘 중 한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잘못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나머지 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잘못을 한 상대보다 우위에 서게 되고, 사정없이 비난을 퍼붓게 되기 십상입니다. 바로 그 순간, 제발 정도 이상으로 잔인해지지 말기 바랍니다. 외로운 전투 중에 실수한 상대를 되도록이면 따뜻하게 대해주기 바랍니다. 』
 
누군가의 실제 축사로 쓰신 글을 칼럼으로 게재한 듯하다. 여기서 꽂힌 키워드는 '외로운 싸움'. '부부'라는 낱말은 다른 것으로 바꿔 끼워도 된다고 생각한다. '가족', '모녀(or 자)', '부녀(or 자)', '베프', '애인' 등등.

누군가가 내게 실수하는, 혹은 나를 서운하게/속상하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외로운 싸움을 하던 중에 길을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길을 잃은 사람에게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말 것.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일이다. 전투도 외로운데 곁에 있는,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도 나를 외롭게 한다면 정말 죽을 것 같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파악하기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외로운 전투를 평생 하다 간다. 누군가를 굳이 특정할 일도 아니다.


"You Shall Not Pass!!!" image from IMDB - The Lord of the Rings


그리고 이 글이 좋았다. 교수님 리드 잡을 때 허니와 클로버 인용해서 덕밍아웃하심

『 입시공부가 갖는 또 하나의 큰 문제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공부를 싫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공부하는 곳에 입학하기 위해 공부가 싫어지는 체험을 해야 하는 역설이 대학입시공부에 있다.

더 큰 문제는 그 싫어진 공부가 곧 공부의 전부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대학진학이라는 목표에 고교시절을 갈아 넣은 뒤,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취업을 대비하라는 사회의 명령을 듣는다. 그리하여 취업이라는 목표에 대학시절마저 갈아 넣고 나면, 시험을 위한 수단이 아닌, 또 다른 종류의 공부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고 나머지 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자신은 공부라면 다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믿으면서.

(중략)

세상에는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할 수도 있는 다른 종류의 공부가 있음을 영원히 모른 채로 죽지 않기 위해서. 』

엄청나게 공감한다. 입시교육이 갖는 가장 큰 문제는 입시를 그리 혹독하게 치르지 않았던 내게도 제법 큰 영향을 미쳤다.
문화란 그런 것이다. 전혀 예외라 생각했던 이조차 실은 젖어 있게끔 하는 것.

요즘 들어서야 진정한 의미에서 전공을 좋아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원래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학계를 완전히 떠나서 '민간인'으로 살아가는 지금에서야 더 그 매력을 자유롭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달까. 분명히 대학원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재미있긴 했지만 입시교육의 연장선상에 있는 어떤 강박이 분명히 존재했다. 요즘은 '궁금해서 배운다'는 배움의 기본기가 좀 더 본격적으로 장착된 것 같다.
나온 김에 하는 얘기지만, 또한 모든 졸업생들(특히 꼰대들(!))이 자주 하는 말이긴 하지만, "지금 학교로 돌아가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
하지만 타임머신이 정말 동작하면 또 MIDI 책을 보느라 기말고사를 빼먹고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하겠지
타과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곤 하는데 좀 더 열심히 들어볼걸 orz 연애도 좀 더 적극적으로/열심히 해볼걸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완벽히 알아야 한다는 강박도 그 입시교육의 연장선상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효율적이지 않게 공부하면 어떻고, 한번에 모르면 또 어떤가. 공부란 사치스럽게 시간을 펑펑 써대며 해야 제맛이고(덕질처럼), 한번에 모르면 두번 세번 읽으면 되지.
하지만 역시 학계에 있었다면 취미생활이 아니라 본업=공부이므로 가성비를 따져야 했을 듯하고, 결국 입시교육의 연장선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 같다. 지금도 학계에 성공적으로 남아 있는 현명한 친구들은 학부 시절부터도 그런 덫에 걸리지 않은 것 같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놀랍게도 공부를 업으로 삼지 않게 되니 세상에는 엄청난 가능성이 널려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일종의 역설.
학교에서는 굳이 가르쳐주지 않는 공부도 상당히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물론 학계에 남아 있는 내 친구들도 즐겁게(대부분 자학개그를 치며 즐거워한다),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Free image from PEXELS


그건 그렇고, 나는 참 한결같이 취향과 의견이 있는 똑똑한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요즘 들어 하게 된다.
아무리 예쁘고 잘생겼어도 취향이 없으면 싫다. 그쪽도 내가 좋다고 안했는데 취향이 있다는 건 의견이 있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의견이 있는데 취향이 없거나, 취향이 있는데 의견이 없는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취향과 의견이 있고, 이를 지켜나가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하는 사람은 아마 평생 매력적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마야마 좋아하는 야마다처럼 계속 좇겠지…. 거의 숙명인 것 같다.
그러한 사람과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기대가 있는 건 아니다. 이성과 동성이 섞여 있고, '그 사람과 내 관계'보다는 '그 사람'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는 것 같으니까. 여기서 '나'는 철저히 제3자. 전지적 작가 시점.
한 마디로 천성적으로 사람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바라바시 류의 연구들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요즘처럼 컴퓨터가 사회학에 많이 쓰이는 시대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왜 학교를 떠났을까… 하지만 그랬더라면 지금 아는 것들을 몰랐겠지. Trade-off.



by renoa | 2018/10/01 00:56 | non-fic。 | 트랙백

Explore this land like no other.

누군가에게는 명절이었겠지만 내겐 여행이었던 일주일이 끝났다.

가족이랑 스위스에 연달아 두 번 다녀올 수 있었던 건 행운이다.
그렇지만 역시 가족 여행은 힘든 것 - Kim's Convenience 속 에피소드처럼 부모님 간의 갈등,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갈등이 벌어지고 봉합되길 반복했다.
사소한 일에 누군가가 짜증을 내면, 상대방이 불쾌해했다가 다시 화해하고, 구세대 중의 누군가가 꼰대 같은(!) 발언을 하면 신세대 중의 누군가가 지적하고, 그것에 마음이 상했다가 결국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마치 시트콤 같은 나날들이 계속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장르가 시트콤이라는 게 개인적으로는 성공적인 가족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이번 여행에서 나는 유독 "그쪽으로 가면 난간이 없어서 위험해!" "조심히 올라가세요!" 같은 warning signal을 많이 보냈다고 한다 - 기억에는 없지만. '가장' 같이 굴었다고 한다).

지난번 Berner Overland 쪽을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셔서 이번에는 Zermatt 쪽과 Jungfrau region을 고루 짰는데, 역시나 예전에 갔던 곳을 좋아하셨다. 체르마트 쪽은 좀 황량하다고 하셨다. 나무가 없어서 그렇지… 다시 융프라우 근처로 오니 나무가 우거져서 좋아하셨다. 엄마가 "이쪽은 조림 사업이 잘된 것 같애"라고 하셔서 "멸치 조림?"이라고 했다가 (정작 엄마는 못 듣고) 우연히 곁에서 들은 동생에게 아재개그라고 등짝스매싱을 당했다.

숙소는 체르마트 쪽에서는 체르마트(Tasch로 잡을까 끝까지 고민했는데, 도착해 보니 역시 체르마트로 잡길 너무 잘한 것 같았다. 적어도 숙소에서 일어날 때 마테호른이 보였으니까. 태쉬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곳), 융프라우 쪽에서는 Wengen에 잡았는데, 집이 너무 산기슭이라 평생동안 구조 계산을 해오신 토목 엔지니어인 아버지가 잔뜩 불안해하셨다. 그래도 최고의 숙소였다 - Thanks god for choosing Airbnb! 작년처럼 호텔을 전전했다면 돈은 돈대로 깨지고 만족도도 그저 그랬을 것이다. 동남쪽으로(방위 맞겠지) 융프라우 봉과 거기에 딸려 있는 Silverhorn이 보이는 곳이었다. 맥주 마시기 최고의 풍경. "Explore this land like no other."하는 에어비앤비 광고에 나오는 그런 장소를 정말로 빌렸다. 우리는 열심히 밥을 해먹고, 동생과 나는 열심히 식기를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여행은 즐겁다. 하지만 다니는 동안 100%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구성원들을 한데 아우르는 것에 가끔 한숨이 나오는 순간도 있고, 그 외 다양한 이유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늘 다시 시간을 돌리고 싶다. 
하루 정도는 늘어지게 쉬고 싶은데, 어딘가 다녀오면 여행 마지막 날 결코 후회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쉬었다고 한들 그리 후회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 
by renoa | 2018/09/30 21:15 | non-fic。 | 트랙백

분노의 기록

평소에 그다지 화를 잘 내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보신주의, 개인주의에 절어 있어서 부조리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이 문제일 정도인데, 요즘 간만에 분노할 일이 생겨 기록함. 혹시 우연히 블로그에 놀러오셨는데 예쁜 글만 보고 싶으신 분은 글을 스킵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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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대상은 이 사회의 '오지라퍼'들이다.
남이 사는 방식, 남의 삶의 모습에 관심 많은 분들이 이 사회에는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손을 내밀어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도움을 청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쓸데없는 손길을 내미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질린다. 

최근 3개의 사례가 있었다. 

#1 회사 임원 A의 사례

임원 A의 말버릇은 "~해보면 알게 될 거예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저연차 직원들에게 하는 말들은 예를 들면 이렇다.

"나중에 다른 회사로 이직해보면 알게 될 거예요. 얼마나 우리 회사의 시스템과는 다른지..."
"나중에 결혼해 보면 지금처럼 돌아다니기 힘들 테니, 여행 많이 해 둬요. 혼자일 때."
"나중에 임원이 되면 그땐 느낄 거예요." 

의도는 다 좋은 말들이고, 사람도 좋고, 어느 하나 악의 있는 부분은 없지만 주니어들은 뭔가 거슬려하고 있었다. 
거슬리는 것의 원인을 살펴 봤더니 '내가 걸어온 길이 맞다'는, 그가 내세우는 대전제 때문인 듯.
그 말을 들었던 직원들이 나중에 과연 이직을 해 봤는데, 결혼을 했는데(혹은 육아를 시작했는데) 또는 임원이 되었는데 그의 말과 다르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감히 '내가 해봤는데 ~이에요' 식의 말이라니. 촌스럽고 폭력적이다.  

함께 차를 타고 어딘가 다녀오는 길에 "꼰대 테스트를 해 봤는데 다 꼰대라고 나왔어요"란다. 
아무 말도 안 하면 상처받을 것 같아서, 나도 아마 그렇게 나올 거라고 위로해주었다. 

#2 타사 여직원 B의 사례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결혼 여부를 너무나 궁금해하고, (미혼일 경우) 왜 안 했는지 따져 묻는다. 

"왜 안 했어요?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거예요."
"어머나! 예식장 잡았어요? 너무나 축하해요 ^^"
"결혼했으니 아이는 꼭 낳으세요."

거의 전도사 수준... 더 놀라운 건 내 또래이다(기성세대도 아니고 왜 때문에...).
여기에 덧붙여 그녀와 쌍벽을 이루는

#3 전 직장 후배 C의 사례 

그는 최근 결혼을 하고 (와이프가) 출산을 했다. 
그는 결혼을 안 했거나 아이가 없는 지인을 만나면 반드시 이야기한다.

"결혼은요... 육아는요... 사람이 꼭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그것을 이루기 전과 후가 정말 달라요. 상상할 수도 없어요."

물론 모든 경험은 하기 전과 후가 다르고, 무경험자는 상상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건 입시를 치르는 경험이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경험 모두 마찬가지다. 애가 없는 기혼 지인들에게 그는 말한다. 

"아이는... 꼭 낳으셔야 해요. 애완동물 기르는 거랑 전혀 달라요." (애완동물 아니라 '반려동물'이거든..)

B는 일 때문에 친하게 지내야 하므로 최대한 그녀의 비위를 맞추고 기쁘게(e.g. "어머! 맞아요~ 그런 생각 저도 했는데 ^^"라면서 맞장구를 치거나 "네, 정말 맞는 말씀이세요"하고 서글서글한 눈망울을 해보인다) 해주는 식으로 관계를 유지하지만 일로도 엮일 일 없는 C는 대번에 아웃이다. 

어릴 적부터 정말 싫은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맞장구를 치는 방식으로 대응하다 보니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것 같다. 내가 좋아하고, 잘 소통이 된다 싶은 친구가 이상한 얘기를 하면 지적할 수 있지만 아예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면 오히려 웃어 주는 것이 방법이다. 그러면 좋아하는 줄 알고 더 하는 게 문제지만... 뭐, 그러라고 놔둔다. 그러면 상대방이 얼마나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오히려 속속들이 알 수 있어서 좋다. 

여담이지만 오래 전 화학 섬유 회사에 다니는 사람과 소개팅을 했는데 회사의 '공대 출신 여자들'이 얼마나 자기들이 예쁘다고 생각하는지(호박 주제에, 라며 그는 씨근거렸다) 내게 털어놨다. "아, 그래요. 그것 참 곤란하겠네요"라고 했더니 거의 1시간 동안 남초 집단에서 성장해서'자기가 예쁜 줄 아는 호박들'에 대해 욕했다. 그런 환경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는 여자들은 정상이 될 수 없다고도 했다. 아 네...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PC)' 않은 발언을 한 것을 잘 귀담아듣고 있다. 
그런 발언들은 속내를 드러내는 거라 재미있다. 

누군가는 반복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말하지만 누군가는 부지불식간에 단 한 번 이야기하므로, 그 발언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를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은연중에 잠깐 드러난 복심을 나는 잊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잘 잊히지 않는다는 편에 가깝다. 누군가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는 순간은 인상적이라 기억에 오래 남는 거다. 그냥 알고만 있을 뿐이고 사람이 언제나 100%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란 쉽지 않고, 또 그래야만 할 이유도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므로 분노하거나 하지도 않는다. 상당히 성차별적이거나 상당히 인종차별적, 계층차별적인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그건 그의 경험과 삶의 어떤 테두리 안에서 얻어진 결론이라 공격하고 싶지 않다. 애초에 그들의 생각은 그들의 문제다. 내 생각이 아님. 하지만 그걸 나에게 주입시키거나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한 마디로 제발 다들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니까, 강요하지 좀 말았으면 좋겠다. 
부모님도 안 하는 간섭을 생판 남에게서, 그것도 업무와 관계없는 분야에서 듣고 있자니(내 자녀 계획이 왜 궁금한데... ㅠㅠ) 미칠 것 같다. 

정말 무례한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배출되는 사회에는 어딘가 큰 결락이 있다. 그 구멍이 아주 빠른 시일 내에 발칙한 시도와 대응으로 메워지기를... 모든 것이 유연해지고 개인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소망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혼율이 엄청 높은 건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혼을 하는 당사자들은 정신적/금전적 비용을 부담해야 하므로 힘든 일이겠지만,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높은 이혼율은 이혼의 터부를 깰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이라는 뜻이다. 
by renoa | 2018/08/11 18:58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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