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上

연초에 누군가가 선물한 <언어의 온도>를 읽기 시작했다. 

***

올해는 책 많이 읽는 해로 정했다. 
쉽게 읽히는 책이건, 여러 차례 정독해야 하는 책이건 손에 잡히는 대로 다독(多讀)하려 한다. 
책을 즐겨 읽는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책을 안 읽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서다. 

어릴 때 책을 가까이했다가 사회 생활을 하며 독서와 멀어진 많은 사람들은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일단 상식은 있다. 자신만의 취향도 있고, 한동안 책을 읽지 않아도 쌓여 있는 자산으로 버텨나간다. 
하지만 누구보다 책과 친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느 순간 책과 엄청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깨닫는다. 
다시 책을 잡아 보지만 눈에 활자가 잘 안 들어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계속 책을 읽은 사람이 꾸준히 쌓은 내공과 마주하게 될 때,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얘기하다 보면 말이 안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화를 이해 못 하는 쪽은 내쪽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동안 수 차례 우리던 무엇인가가 다 닳은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예전에는 잘 기억했던 책 속의 일화나 정보도 가물가물하다. 마치 한 번도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처럼.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독서에 대한 자신감을 잃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책을 읽기로 했다. 
독서의 방향은 복잡하지 않게, '서(書)연' 닿는 책은 닥치는 대로 다 읽기로. 
책을 많이 읽는 시기에는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뭔가를 하려면 가볍게 시작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원서도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

이런 맥락에서 처음 쥔 책이 <언어의 온도>다. 
쉽게 넘어가는 책에 속해서, 표지를 넘긴 지 몇 분 안 지난 것 같은데 50페이지가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할까?

취향이 아니다. 

일단 에세이 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정말 글맛나게 쓰거나 발상이 기발한 에세이는 재밌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은 유감스럽게도 그 부류에 속하지는 않는 듯하다. '예쁘게' 쓰여져 있을지언정 기가 막히게 쓰여져 있지 않고, 글의 저변에 깔린 생각들은 사려깊지만 좀 진부하다. 한 마디로 내가 즐겁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류의 에세이가 아니다. 본질적인 측면에서나 혹은 기술적인 측면 양쪽에서 불만이 많은 글.

또 다른 이유. 이런 에세이를 읽게 되면 작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그 생각이라는 게 영 착잡하다. 
어쩌면 저자는 내가 좋아하는 업계 동료 J처럼 자신의 일도 꼼꼼하게 해치우면서 글솜씨와 마음 씀씀이까지 환상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나는 그를 모르니까 최대한 그런 쪽으로 상상하고 싶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이 언행일치가 안 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서, 이렇게 달달하고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글을 보노라면, 저자가 직접 만났을 때 그런 스타일일(=글과 같은 느낌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성인군자라도 결점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류의 책으로 이렇게 이미지 메이킹을 해서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같은 맥락의 생각이다. 에이, 좋은 사람이겠지. 

나 같은 경우, 이렇게 따스하지 않아서(물론 따스할 때도 있지만 냉정할 때도 있고, TPO에 따라 바뀌는 다층 레이어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생각한다), 책을 낸다면 정보성 혹은 아예 픽션일 것 같다. 

동시에 실제로 한결같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도 재미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선생님이 언제나 좋아하는 범생이는 같이 놀고 싶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일단 취향이 아닌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전자인 것으로 해둬야겠다. 재미가 없다. ㅠㅠ 재미가. 어쩌면 내가 이런 류의 따스함만 강조하는 책을 영 닭살스러워서 잘 못 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온기를 전하려면 닭고기 수프 어쩌고 하는 책처럼 스토리텔링이라도 해주지, 이런 주제에 형식까지 에세이면 나에게는 너무너무 재미가 없는 컨텐츠인 것이다. 

글의 구조나 흐름은 논리가 서 있고, 또 전반적인 교열 상태도 훌륭하다. 
이 토막글들을 읽다 보면, 내가 보던/쓰던 지면 칼럼들이 생각난다. 아주 대단한 아이디어를 담지 않아도, 시사적인 내용을 끌어다 어떤 교훈 혹은 느낌을 표현하면 충분한 글들. 

엄청 열심히 일해도 회사원, 와서 점심먹고 놀아도 회사원인 것처럼 세상에는 정보와 인사이트로 가득한 글과 그냥 글들이 뒤섞여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일기를 쓴다. 그리고 몇몇은 그 일기를 출판하는데, 그 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매우 해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딱 그정도. 더 읽으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름. (언어의 온도 下에 계속)
더 보다가 재미가 없으면 그만 읽고 중고장터에 팔아버려야겠다. 



 

by renoa | 2019/01/12 17:25 | review。 | 트랙백

단상

새해 첫 출근일부터 많이 울었다.

그 누구도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없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소통해야 하는 이 땅 위에서 서글픈 일은 참으로 많다. 지금껏 많아 왔고, 아마 앞으로도 많으리라. 

이해받지 못하는 서러움에 울었고, 또 이해하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울었다.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슬픈 일 같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 같은 생각을 했던 듯하다. 하지만 이 생각은 너무 처량했기에 자라면서 반대 생각 - "세상은 즐거운 곳이야." - 을 의도적으로 많이 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조증에 걸린 미국인처럼 많이 웃고, 신난 것 같은 태도를 보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누군가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는데 반대의 주장도 가능하다. 삶은 디테일에 집착하면(='덕후'가 되면?) 희극이고, 너무 본질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고민하면 비극이 되는 것 같다.

정신을 팔 만한 디테일은 도처에 널려 있다. 건전하게는 온갖 종류의 학문, 그리고 미드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앉은 자리에서 전부 생각해낼 수 없는 수많은 정신적/신체적 유희들. 어쩌면 근본적인 허무감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디테일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개선'이라는 말은 때로 어쩌면 이렇게 공허한지.
전혀 개선되지 않고 반복되는 일도 존재하는 법이다. 아니, 어쩌면 그쪽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

마블 히어로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겹다'. "그만 좀 나와!"라고 허공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 

개인적인 불호는 그렇다 쳐도, MCU의 전성기는 생각할 만한 거리가 있는 듯하다.

전 세계적으로 제작비의 양극화가 이뤄지고 있고(국내에서 쓸만한 로맨스 무비들이 사라진 지 얼마나 되었는지), 세계 어느 국가로 수출해도 크게 취향을 타지 않는 블록버스터는 제작자와 투자자에게 안심이 되는 선택일 것이다. 

이 같은 경향성은 점차 짙어지고 있고, 그 가운데 마블이 영리하게 세계관을 거미줄처럼 엮어서 MCU를 구축하고 있다. 

A의 말마따나 마블의 등장은 시대의 부름이고, 마블이 특별히 잘했다기보다 마블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고 DC는 대응을 제대로 못 했다. DC 바보... 

사람들은 왜 히어로물을 좋아할까? 

이런 궁금증을 가졌다가 얼마 전 <스파이더맨:뉴 유니버스>를 보고 즉시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팝콘을 먹으며 볼 수 있는 신나는 액션이야 핵심 요소겠고, 정신적으로도 히어로 무비는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누구나 외롭고, 자신만의 싸움을 하고 있고 또 그 싸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히어로물을 보고 힘을 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지치는 하루하루다. 

그러면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을까? 아주 오래 전에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성장에 대한 압박을 받았고, 또 외롭게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을까?

대학생 때까지 단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이 요즘 들어서 지독히 궁금할 때가 많다. 인문/교양은 대학교 1학년생에게도 필요하지만, 사람마다 성장 속도가 다름을 감안했을 때, 그리고 요즘 진정으로 철이 드는 건 졸업 이후인 케이스가 많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좀 뒤늦게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래서 MOOC가 필요해. 지금 대학생 때 들었던 교양 수업을 듣는다면 질문을 참 많이 던질 것 같다. 그것도, 그 나이대에 결코 알 수 없었던 어떤 경험을 갖고 진솔하게. 

***

밥이 기름지게 됐다. 역시 다시마를 넣고 밥을 지으면 찰기가 돈다. 감자도 넣어 봐야지. 

청경채는 맛있는 채소다. 두부는 날로 먹어도 맛있고, 국에 넣어서 끓여 먹어도 맛있다. 어떻게 옛날 사람들은 두부 같은 음식을 만들 생각을 했던 것일까. 

회사의 한 상무님이 "밥을 같이 먹는 것은 중요하다"고 했었다. 밥을 같이 먹는 '식구'는 특별한 존재라고. 나는 그가 좋을 때도 있고 좀 너무 간섭한다 싶을 때도 있지만 그 말 만큼은 존중한다. 밥을 함께 먹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밥을 짓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거창하게 요리라고 할 건 아니지만, 여러가지 음식을 만드는 것은 과정도 즐겁고 결과물도 (맛있어서) 좋다. 생산적인 일을 하는 느낌이다. 야채를 다듬거나 레시피를 고민할 때면 조금 더 웰빙에 다가가는 느낌. 

새해에는 집밥을 많이 지어야 할 것 같다. 

by renoa | 2019/01/07 03:12 | non-fic。 | 트랙백

낯선 땅 신비로운 체험

1. 

같은 업계 다른 회사의 동료가 함께 출장을 가자고 했을 때, 호기롭게 "좋아!"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낮다고 생각하며. 

그런데 왜 '좋아'라고 했냐면, 좀 복잡한 이유가 있다. 

일단, 일의 결과가 어찌되든 제안을 받으면 즉시 긍정적인 사인을 보내는 데 익숙해졌다. 어차피 언제나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다. 첫 답변은 최종 답변이라기보다는 상대방 자체에 대한 인상을 전달하는 자리라고 보면 된다(는 게 최근 나의 생각이다). "좋아!" "오키!" "그래!" 이런 말들은 '나는 너를 신뢰함' 혹은 '너의 제안이라면 묻따않 오케이지'의 의미와 동일하다. 

또 다른 이유는, 정말로 해당 출장 제안이 흥미롭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전달했다. 회사에 결재를 올리면 절대 안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안 될 거라고 단정지은 까닭은 간단하다. 일단 출장지가 좀 뜬금없었다.
동료의 회사는 해당 지역을 전략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그래서 담당자인 그의 출장도 잦았던 거고. 실제로 동료의 회사는 해당 지역과 연계된 여러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그렇지가 않았다. 

나중에 가격을 받아 보니 비싸기도 되게 비쌌다. 
지구 반 바퀴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거리였으니. 

2.

그럼에도 그에게 "좋아!"라고 외친 데 대한 정성은 보여야 할 것 같았다. 
윗선에 해당 출장 얘기를 꺼내 봤는데, 의외로 "재밌는데?"라며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본업과 100%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굳이 연관성을 %로 나타내자면 한자릿수 정도일 듯한 출장이 생겨나게 된 비화다... 

그래서 문득 이 낯선 땅에 왔고, 워낙 오기 전까지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았기에 제대로 준비조차 못 하고 왔다. 
어떤 경험을 하게 될 지 상상에 맡기면서. 

비행기 일정은 꼬이고 꼬여 두 번이나 경유를 했다. 스탑오버 시간이 짧아 거의 놓칠 뻔 하기도 하고, 입국 비자를 작성하며 새로운 문화 체험을 하기도 하면서 피곤하게 들어왔다. 꼬박 열두 시간을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났다. 

3. 

그 피곤한 와중에도 믿는 구석이 하나쯤은 있었다.

이 땅은 절대로 내게 위해를 가할 곳이 아니라는 믿음. 

릴렉스를 하기에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고, 그래서 비록 출장을 온 것이긴 하지만 나는 내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어떤 막연한 신뢰. 

4. 

플라시보 효과일지, 실제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 믿음은 현실화되고 있다. 

하루하루 지낼수록 정이 붙기 시작했고, 고작 3일째 머무르고 있을 뿐인데 벌써 좋아졌다. 

살면서 생생하게 들을 기회가 도통 없는 현지 사정을 현지인들에게 듣고, 다양한 사업 기회와 현지의 특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엄청나게 화려한 로컬 결혼식장에 들어서서 영화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경험도 했다. 마치 세트장 전경 같은, 온통 하얀 건물을 보고 오기도 하고. 포장 도로 위를 달리는 데도 마치 비포장 도로 위를 주행하듯, 아래위로 폭 크게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졸기도 하고. 

그 와중에 중간중간, 국내에 놓아 두고 온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을 빠듯하게 쓰는데 묘하게 알찬 느낌, 묘하게 즐겁고 생기 넘치는 느낌이 있다. 
고작 3일이 지났을 뿐인데, 여기를 오게 된 것은 어떤 인연의 흐름에 따른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5. 

그 과정에서 조금 더 정이 가게 된 다른 회사의 동료와, 또 다른 동료들. 

영리하고 재미있는, 그러면서도 악의 없는(현재로서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은 고맙고도 또 고마운 일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저 이 순간의 행운이라고밖에 얘기할 수 없는. 

인생은 경험의 총합이라는 말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의 소중하고 또 따스하면서도 즐거운 경험이 결국 내 좋은 추억 하나를 더 만들 것이고, 어쩌면 인간은 좋은 추억을 연료 삼아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딛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런 생각을 3~4년 전까지만 해도 안 했던 것 같은데, 역시 나이가 드니 인생은 한 번 사는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소중한 시간에 누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면 어떻고, 질문/발표할 때 실수하면 어떻고. 여러가지 형태의 자잘한 실패와 망신, 오해가 인생 전체에서 무슨 상관일까. 그저 무념무상으로 최선을 다하기에도 짧은 시간이라서. 

6.

불꽃놀이 같은 하루하루.
by renoa | 2018/11/20 03:39 | non-fic。 | 트랙백

Don't look back into the sun / The Libertines

같은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같은 시간/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사실 누구도 동일 인물이 아니니까, 이런 경우는 '많은' 정도가 아니라 늘 그렇다고 봐야겠지.  
한때 다정했던 애인들이, 단란한 시간을 보냈던 가족들이, 함께 학창시절을 겪었던 친구들이 같은 일을 반추할 때 반대되는 감정을 느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나와 내 친구는 똑같이 서울에서 자라고 같은 학교로 진학했지만 서로 관심사가 달랐기에 한 시대를 서로 다르게 기억한다.
그에게 중고등학교 시절은 젝키와 HOT '오빠들'의 기억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듯하다. 나는 젝키 멤버 이름도 모른다.
내 중고등학교 시절은 오히려 서울 코믹의 기억이 선명하다(쿨럭)... 그는 서코가 뭔지 모른다(쿨럭). 
개개인의 관심사라는 것은 가끔 엄청나게 큰 걸 못 보게끔 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사건을 아예 모르고 그 시절을 지났다가 추후에 알게 되기도 한다. 

이런 일반론에 가까운 썰을 길게 푸는 이유는 오늘 바로 같은 경험을 해서다.
밤새 보고서를 쓰면서 넷플릭스에 새로 런칭된 영드 하나를 리스닝 용도로 귀에 걸어놓고 계속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제목은 <The Inbetweeners>. 영국 또라이 청소년 드라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드는 E4 작품인데, 내용은 그닥 임팩트 없지만 그냥 소년들의 영국 발음을 노동요 대용으로 쓸 생각에 무념무상으로 듣고 있었다. 그런데 Pilot 에피소드가 끝나면서 엔딩곡이 나오는 게 엄청 좋은 거다. 뭐지? 이 노래? Don't look back into the sun...

첫 마디가 곧 제목이었다. 밴드는 리버틴즈. 

활동 시기는 2002~2004. 응? 학생일 때다. 이때 열심히 음악 서치하던 시절인데... 리버틴즈 왜 몰랐지. 
심지어 넥스트 오아시스? 오아시스 계열 밴드 엄청 좋아하던 시절인데 정말 왜 몰랐지? 
피트 도허티? 예전에 케이트 모스 덕질(?)할 때 그녀의 애인으로 검색 한 번 해봤던 사람이다. 보컬이네;; 리버틴즈 노래는 한 번도 안 들어보고 보컬만 익숙했군. 

그랬다. 그들이 브릿락의 기세를 몰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마약을 하고, 신보를 내고, 스캔들을 뿌리고, 청춘을 불태우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얻어가는 동안 나는 '몰랐다'. 그 2002~2004 사이에 나는 방학을 활용해 동유럽 여행을 했고, 한 근사한 투자회사 인턴 제의를 받았지만 따분할 거라는 생각에 거절했으며 문라이즈 레이블의 전자양 노래를 들었고 학관에서 가끔 호사를 누린답시고 2,500원짜리 메뉴B를 먹었다. 그리고 숙제를 했으며 수업을 빠지고 중간/기말고사를 봤다. 

그리고 15년여가 흐른 뒤의 나는 나와 같은 동시대를 살았던(그것도 시끄럽게 살았던) 그들의 정보를 찾아본다. 
그러는 와중에도 보고서를 썼으며 Don't look back... 이 노래가 좋아서 밤새 한 15번은 반복 재생한 것 같다. 찾아보니 또다른 보컬 칼 바렛도 이 노래를 만들고 나서 너무 좋아서 잘 때도 들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사진을 찾아보니 너무 취향이다. 목소리도 좋고 스타일도 좋고... 십수 년의 덕질할 세월이 있었는데 이제서야 알았다니.

분명히 지금도 어디선가 내가 무척 좋아할 사건이 벌어지고 또 좋아할 사람이 좋아할 행동을 하고 있겠지만, 사람은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한 가지 일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분명히 나는 전부 다 인지하지 못하겠지. 그중 일부는 평생 인지하지 못한 채로 사라질 테고, 아마 우연히 10년 뒤에 이처럼 인지하는 일들이 생길 것이다. 
그런 시간의 갭이 너무 신기하고 또 애틋하다. 이미 죽고 없는 작가의 발자취를 뒤지는 게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조차도 알 수가 없어. 

P.S. 참고로 인비트위너스 주인공 학생 4명을 귀여운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기껏해야 90년대 중후반생이려나 하고) 알고보니 87년, 83년생;; 인비트위너스도 2008년 드라마로, 이제서야 넷플릭스에 풀린 거였다.

by renoa | 2018/10/29 07:22 | non-fic。 | 트랙백

김씨네 편의점 外

1. 미지와의 조우

이번 말레이시아 출장이 급하게 잡혔을 때, 두려움에 떨었다. 어쩐지, 동남아는 무서운 곳이라 생각해서다. 
편견투성이 생각이라는 점 인정. 서로 개성이 다른 여러 개 국가를 한데 뭉뚱그려 '동남아'로 표현하는 오류를 범한 것도 인정.
하지만 일본/북미/유럽을 각 10회 남짓 가는 동안 동남아는 단 한 번도 안 가봤다. 미지의 세계는 두렵기 마련이라규...


Free image from pixabay

하필 비행기가 연착되어 자정 무렵에 착륙했다. 동남아 많은 국가에서 영업하는 Grab을 이용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Grab은 Uber와 동일한 BM이기 때문에 운전자들이 전문 택시기사가 아니다. 차와 시간이 있으면 누구나 Uber 운전자로 나서듯, Grab도 마찬가지. 검증 안 된 현지인이 납치해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오만 상상을 했다.

공항 - 숙소까지 약 60~70RM이면(막힘 없을 때 1시간 가량 타고 가는 거리인데, 우리 돈으로 2만원 이하) 갈 수 있는데 KLIA Express를 타고 굳이 KL Sentral(*Central이 아님)까지 간 것도 그 때문. 이제 Sentral 역 - 호텔까지만 가면 되는데, 차로 약 7분, 13RM 나오는 거리. 불안함에 떨며 그랩을 불렀더니...

두둥. 나타난 것은 실망스럽게도(?) 건실해 보이는 말레이인 청년이었다. 실제로 건실하게, 내비게이션을 따라 얌전히 운전해 주셨다. 내릴 때 15RM을 주자 2RM(600원 가량)을 거슬러줬다. (...) 그냥 됐다고 했다.

이후 약 2박3일간의 출장 기간 동안 알게 된 사실. 쿠알라룸푸르는 엄청 세련됐고 치안이 좋으며, 음식이 굉장히 맛있다. (동남아 음식 입맛에 안 맞을까봐 걱정했던 게 바보 같다... 서울에 온갖 나라 음식이 다 있는 것처럼 KL도 국제 도시라 모든 맛난 음식이 다 있다 + 현지음식, 태국인들이 많아 태국음식 퀄리티가 좋음)

검증해야 하는 것이 현지향(向) 화장품이라, 이틀간 몰 10개 돔. 쇼핑몰에서 매일 1만보씩 걸었지만 관광은 전혀 못함.

※ 돌아오는 길에 지인들 나눠주려고 해당 화장품 회사 제품을 대거 구매해 왔는데, 업체 대표님께서 해당 제품 매출이 공항에서 눈에 띄게 좋았다고 자랑하셨다. BG는 "잘못된 매출 예상은 재고의 지름길"이라며 얼른 이야기하라고 했지만, 너무 좋아하셔서 용기가 안 났음. 미미하니까. 나중에 회사 잘되면 농담 삼아 꺼내봐야지. "사실 그때 말이죠..."


                                 
2. 김씨네 편의점

최근 NETFLIX 덕분에(때문에?) 영상물과 조금 친숙해졌다. 그간 개인적으로 TEXT >>>>> VIDEO 의 선호도를 갖고 있어서 가끔씩 보는 영화를 제외하면 YOUTUBE 같은 일반 영상물이나 TV SERIES 보는 걸 매우 힘들어했는데, 침대가 있고, 거대 모니터가 있고 또 NETFLIX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드라마 볼 기회가 늘었다. NETFLIX는 자체제작 드라마 명가다. 소싱한 영화보다도 NETFLIX ORIGINALS가 일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드 보는 건 여전히 너무 힘들다. <미스터 션**>보다가 1화인가 2화만에 너무 신파라 접었다)

이 NETFLIX에, 완전 빠져들어 순식간에 정주행한 드라마가 있다. 미드 아니고 캐드. 이미 미드팬들은 다 아는 <Kim's Convenience>.  일명 김씨네 편의점.

Image from IMDB

꽤 웃기고 재밌다. 어색한 부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합격점이다. 한국계 이민 커뮤니티의 어떤 특징을 활용한 개그 센스가 상당히 뛰어난데, 그 난이도(?) 조절이 아주 예술이다.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해서, 해당 선의 너무 안쪽으로 넘어가면 한인들만 이해하고 너무 바깥쪽에서 맴돌면 겉돌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어려움이 있다. 이 작품은 그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한 것 같다(캐나다 내에서 전반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또 묘한 각도로 접근하면 자존심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데 영리하게 잘 비껴가면서 웃긴 느낌?
(전반적으로 거슬리는 부분은 거의 없었고, 딱 한 장면이 거슬렸는데 동해 vs. Sea of Japan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 부분 보면서 '음, 이건 국내/한인커뮤니티 시청자들이 좀 발끈하겠는데' 싶었다. 추후에 검색해보니 아니나다를까 해당 부분을 지적한 게시물이 상당수 있었다. 역시 문화라는 건 다루기 어려워... )

웃기고, 또 웃긴데 묘하게 짙은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것이 특징.

Reddit에 올라온 글들은 호평 일색이다. 극중 가족 4인의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고 니나 목사님, 중국계 친 사장님, 인도계 메타 사장님 캐릭터 너무 매력적이다. 메타 아저씨 너무 좋아. ㅎㅎ '아빠'랑 메타 아저씨가 가부장 대화 나누는 게 압권으로 웃김. 하지만 '진짜 편의점'을 했던 집안의 어느 한국계 미국인은 너무 마음 아파서 못 보겠다고도 했다.

의미가 큰 작품이다. 일단 첫 아시아계 주연(1인도 아니고 가족이!)으로 북미 시장에서 리얼 히트를 친 드라마라는 게 대단하다. 시즌 1~2를 성공적으로 찍었고 엄청난 떡밥이 던져진 상태로 시즌 3 방영이 예정되어 있다. 일단 Pilot 마치고 방영됐다는 것은 성공적 시그널, 시즌 3까지 제작되고 있다는 것은 더 성공적 시그널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장르가 '일상물'이라는 점. 그리고 한인 특성을 이용한 자학개그(?)가 꽤 많다는 점. 일상물이라는 건, 한인 특성이 살아있는 가족의 '있는 그대로'를 전달해도 재미있게 받아들여진다는 뜻이다. 자학개그는 일종의 자신감으로 해석된다. 진짜 바보한테 "야, 이 바보야!"하면 엄청 실례고 당사자도 서럽지만, 머리 좋은 사람이 "하하, 제가 좀 멍청해서요..."라고 하면 농담이 된다. 자학 '개그'를 친다는 건 그래서 일종의 여유가 있다는 의미.

아까 너무 좋아하는 씬 중 하나로 꼽았던 '아빠' & 메타 아저씨가 나와서 가부장 대화 하는 모습도 그래서 좋았다. 세대차/문화차는 유머로 극복해야지, 정색하고 덤비면 상호간에 진짜 슬퍼진다. 또 다른 사례는 1편 오프닝 장면. 김 사장이 가게에 게이 페스티벌 포스터 붙이는 걸 반대하자(동성애에 보수적인 한인 기성세대에 대한 오마쥬), 포스터를 붙이려는 게이가 "그거 차별"이라고 지적한다. 머쓱해진 김 사장. "내가 동성애자 차별을 하면 왜 우리 가게에 게이 디스카운트가 있겠어요?"
이런 화법은 정신적 여유 없이는 절대 나올 수가 없음.

Crazy Rich Asians가 흥행하고, NETFLIX ORIGINALS 중 재밌게 본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도 제법 인기를 끌었다(그래서 야쿠르트 동났다고 한다)... 확실히 무언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긴 하다. (Searching도 아주 신선하게 봄)

보이지 않는 차별이 가장 심한 업계 중 하나가 쇼비즈니스 업계가 아닐까?
사회는 PC한 메시지를 던지라고 가르치지만(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세요, 설마 너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보면 모든 올바름이 산산이 깨진다. 최대한 늘씬하며 아름다운 외모, 최상위(?라는 게 존재한다면)의 분위기를 풍겨야 대접받는 곳. White Washing이 빈번한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 엔터 업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은 법안 하나 통과된 것보다 더 큰 의미로 보인다. 제도의 변화보다 문화의 변화가 훨씬 파워풀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기 때문에.

솔직히 해리 포터의 Cho Chang은 너무 소모적 캐릭터(캐릭터 설정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였어. 차라리 루나 역할에 초 챙을 배치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아시안으로서 해보지만, 그건 조앤 롤링 마음이니까.


by renoa | 2018/10/12 19:32 | non-fic。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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