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과 미룸

§ 마감 

'마감'은 아주 오묘한 단어다. 두려움과 평온을 동시에 준다. 시간 내에 끝마치지 못하면 어쩌지. 마무리는 둘째치고 주제 잡는 것부터 실패하면 어쩌지. 겨우 끝내더라도 지리멸렬한 결과가 나오면 어쩌지. 불안감이 스멀스멀 온몸을 감싸게 되는 '시작'의 단어인 동시에,

그래도 마감이 지나면 뭔가 되어 있겠지.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끝'의 단어다. 그래, 지리멸렬하면 어때. 결과가 좀 멸치 같으면 어떻고 원숭이 같으면 어때. 일단 마감이 지난 시점에는 분명 아웃풋이 나와 있을 것이다. 품질과는 별개로. 근거로는 '지금까지 마감을 펑크낸 적이 없으니까'. 그런 결과물이 쌓여서 한 걸음씩 진전이 있는 거겠지, 하고 미리 안도하게 되는 단어다. 

이 안도감은 윤상도 부르고 SES도 부른 '달리기' 가사와도 맥이 닿아 있다.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마감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마감이 다가온다. 끝난 뒤에 지겨울 만큼 쉬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일을 시작해서 끝냈다는 사실은 살면서 겪는 가장 산뜻한 경험 중 하나다. 산뜻하게 다음 시작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미리 평온. 



§ 미룸

마감 시간을 알고, 뭘 해야 하는지 알면 당장 착수하는 게 '상식적인' 사람이 할 일이다. 하지만 상식이 없어서인지 결코 일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급해지지만 행동은 반비례해서 더 우아해진다. 차도 한 잔 마시고, 목운동도 하고, '상황을 다각도에서 바라보기 위해' 인터넷 검색도 해서 자료도 찾는다. 사실 자료를 찾는 행동은 작업에 해당하지만 일은 결코 그렇게 상식적으로 돌아가게끔 되어 있지 않다. 정신을 차려 보면 일과는 관계 없는 글을 보고 있다. 아주 쓸데없는 건 아니지만 딱히 지금 알아야 할 이유도 없는 그런 것. 

그렇게 시간이 또 흐르고 이제는 진짜, 정말로,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은 순간이 온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느긋함에 제동을 건다면 성공이다. 절반의 성공이 아니라 100퍼센트의 성공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반장은 한 달 보름 전부터 시험공부를 했다. 반장처럼 살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일주일 전에 하면 대성공, 삼일 전에 하면 성공이다. 둘 다 100%의 성공이다. 딱 그 정도 느낌의 이른 시작. 

보통 그 순간도 넘긴다. 하지 않으면 '죽는다' 구간에 진입한다. 여기까지 참으면 이제 마감의 미학을 제대로 즐길 자세가 된 것이다. 1초에도 몇 번이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격한 감정 기복, 기복은 작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날카로운 판단, 비장함이 깃든 감정의 제거와 같은 일련의 '예상 가능한' 과정을 거치면서 진짜 몰입하게 된다. 

그때의 몰입감은 마약과 닮았다. 그 기분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그짓을 한 사람은 없을 거다. 다분히 성향의 문제다. 

자신감을 갖기 위해 글을 읽을 때가 있다.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글을 읽고 위안을 얻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링크   
  
by renoa | 2014/12/24 12:13 | non-fic。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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