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ovie Talk: Before something

영화관 앞을 어슬렁거리다가 보물을 발견했다.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퇴근길에 들렀을 뿐이다), 그래도 뭔가 보면 참 즐거울 것 같은 마음. <곡성>은 찜찜하고(쏟아지는 호평은 알고 있지만, 이 감독의 영화는 무섭다. 개인적 취향) 관심이 가던 <아가씨>는 아직 개봉하지 않은 시점. 수퍼 히어로물은 식상하고(제발 좀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브루클린>은 참지 못하고 이미 올레TV로 본 상태.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진짜 보석같은 영화를 발견했으니, 국내 상영 20주년을 기념해 재개봉한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였다.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금발에, 나른한 듯 지적인 미소를 흘리는 줄리 델피. '네 말이라면 무슨 내용이든 집중할 준비가 돼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애정어린 눈빛의 에단 호크. 두 청춘 스타가 등장하는 이 영화는 한동안 여행에 대한 로망을 부추겼다. <비포 선라이즈>를 본 이들 대다수가 영화 속 장면에 자신을 대입해 상상해 봤을 거다. 혼자서 여행을 떠났는데 나와 너무나 잘 맞는, 마치 꿈에서나 만났을 법한 사람과 우연히 마주치는 기적. 여행과 인생은 닮은 구석이 많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한 '여행 로망'을 넘어, 숱한 젊은이들의 '반려자 로망'에 불을 질렀다. 인생(여행) 속에서 영혼의 짝과 우연히 연결되는 행운 말이다.

까다로운 요구 사항(영화는 보고 싶은데 개봉작 중에는 딱히 볼 만한 게 없고, 힐링은 필요하고)을 모두 충족시켰다는 점에서 이미 선택은 만족스러웠지만, 관람이 시작되자 이 영화는 그 자체의 완성도도 높았다는 걸 다시 실감했다. 셀린느(줄리 델피)와 제시(에단 호크)는 아마 멜로 영화 커플 가운데 꽤나 말 많은 커플 축에 속할 것이다. 극중에서 둘은 끊임없이 떠드는데, 그저 사교적인 대화("정말 예쁘다", "어떤 여자 좋아해?")는 거의 없다. 대부분 자신의 시각과 가치관, 경험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평소 생각이 많은 두 사람의 지적인 탐구심과 호기심이 서로에 대한 호감에 녹아들어 재치 있는 대사로 구현된다. 거기에 적당한 거리감까지 자연스럽게 넣었으니, 링클레이터 감독은 (적어도 이 영화에 한해서는) 천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는 기차, 독서삼매경에 빠진 두 사람. 싸우는 독일인 부부. 우연히 함께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가 읽는 책을 확인한다. 곧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두 사람. 이상한 일이지만 하루를 함께 보내고 싶은 열망이 들고, 둘은 충동적으로 비엔나에 내린다. 어린 시절과 신념, 자신의 감정 상태와 희망에 대해 말하며 다리에서 궁전으로, 카페에서 바로 정처없이 걷는 두 사람. 오래 된 관광지지만 낯선 곳에서, 둘은 역설적으로 낯설지만 오래 된 친구 같은 관계를 발견한다.

이번 재개봉작 관람이 계기가 돼 이른바 '비포 시리즈'라 불리는 세 영화, <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 Before Sunset>·<비포 미드나잇 Before Midnight>을 정주행했다. 지금까지는 비포 선라이즈를 두어 차례 보고, 비포 미드나잇을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봤었다. 이어지는 시리즈의 2편을 안 보고 1,3편을 본 셈이니 좀 이상하긴 하다. 딱 그 정도가 비포 시리즈에 대한 그간의 감정을 대변했던 것 같다. '<비포 선라이즈>는 무척 재미있었고, <비포 미드나잇>은 우연히 봤는데 또 다른 매력이 있네. 하지만 이미 놓친 <비포 선셋>까지 챙겨 볼 정도로 이 시리즈 광팬은 아니야.' 하지만 이번에는 봤다. 처음으로 전체 내용이 궁금해졌다.  

기차에서 처음 만나 비엔나 시내를 거닐며 서로를 알아가는 두 사람. 각자의 세월을 보내고 직업을 가진 상태로 파리에서 재회한 두 사람. 풋풋함이 가신 자리에 익숙함과 편안함, 갈등이 들어선 모습을 보여주는 그리스의 두 사람. 시간 순서대로 본 비포 시리즈는 멜로 영화라기보다 일종의 '사회적 실험'처럼 느껴졌다. 피험자는 관객이다. 예컨대 이런 거다. 갓 20대가 된 젊은이들에게 세 편의 영화를 모두 보여준 뒤 영화를 관람하기 전과 후 가치관이 어떻게 변했는지 몇 가지 질문을 통해 관찰하는 것이다. 결혼과 애정, 지속적 관계 유지, 노화 등 다양한 인생의 문제에 대한 생각을. 관람 전과 후의 가치관이 다르게 나타나는 애들이 제법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전향적 연구(prospective study) 중인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면 '인생의 중요한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어 갈지 상상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리즈는 그 상상을 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다른 멜로물과 차별화된다. 각 편이 독립된 가치를 지니지만, 이 시리즈가 정녕 철학적일 수 있는 이유는 세 편이 9년에 한 편씩, 18년에 걸쳐 개봉했다는 점 때문이다. 한때 인기를 누렸던 스타들의 쪼그라든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고(<비포 미드나잇>에서는 줄리 델피의 '날것 그대로의 유방'이 노출된다), 한때 러브러브한 시선으로 서로를 더듬던 연인이 어떻게 불평을 쏟아내고, 그러면서도 안정된 관계를 꾸려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부모도 한때는 학생이었고, 결혼하기 전 '만나던' 시절이 있었음을 우리는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링클레이터-델피-호크, 그리고 스태프들은 그 단순하지만 상상이 용이하지 않은 진리를 관객들에게 선물로 준다. '자, 보렴. 여기 가시화해봤어'라며. 수수한 포장을 씌워 별것 아닌 것처럼 주지만, 사실 굉장히 희귀한 선물이다.


※이미지 출처는 전부 IMDB. 
by renoa | 2016/06/08 23:09 | review。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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