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손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여유 속에서 탄생한다. 

적절한 물질적 여유로움과 넉넉한 배움, 그리고 충분한 시간은 공기를 우아하게 만들어 준다. 닥터 지바고가 어릴 적 살았던 그로메코 댁이 그랬듯. 이런 분위기 참 좋다. <그해, 여름 손님>에 나오는 17세 소년 엘리오의 집도 딱 그런 집. 이탈리아 근교에 사는 소년 엘리오의 아버지는 교수로, 매년 젊은 학자 한 명을 여름 손님으로 받아 교류도 하고, 학술적 도움도 받는다. 

뜨거운 태양과 로사텔로 와인, 젊은 학자들. 몇몇 교양 있는 방문객들. 열정 넘치는 이웃. 오후의 나른함. 고택. 해변이라니...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라면 무조건 친해지고 싶을 듯. 설령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게다가 책을 좋아하는 영리한 아이라니. 몇 장 읽지도 않았는데 이미 엘리오에게 반할 것 같았다.

이렇게 매력적인 주인공이 자기만큼이나 매력 있는 사람을 만난다.
그해 여름 손님으로 찾아온 미국인 학자가 그 사람이다.
엘리오는 그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데, 이 마음은 점차 저릿한 감정으로 발전해 간다. 절절한 짝사랑 끝에 결국 마음이 닿기까지, 짧으면서도 한없이 긴 듯한 과정을 보며 어쩐지 호숫가의 심상이 떠올랐다.
날씨가 아주 맑은 오후, 호숫가에 앉아 수면을 바라보면 무수히 많은 별이 보인다. 물결을 따라 끝없이 반짝이는 모습이 눈부시면서도 어딘가 애틋한데, 이 소설이 어쩐지 그런 느낌이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지적이고,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어떤 애틋함. 

많은 호기심은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그저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어떤 호기심은 정말 사랑이 된다. 일단 사랑이 되고 나면, 그 사랑이 시작해서 끝나기까지의 과정은 분명히 가치있고 - 그 과정이 아프든 아니든 간에, 하지만 대부분 아플 것 - 끝나고 나서는 반드시 상흔이 남는다고 생각한다. 상처가 클 때도 있고 작을 때도 있지만, 반드시 남는다. 

하지만 모든 상처가 아무는 건 아니다. 팔 한 쪽이 잘리면 재생되지 않는 것처럼, 어떤 상처는 매우 지독하고 평생을 갈 수 있을 텐데(여기서부터는 스포가 조금 있을지도 모르겠으니 읽으실 분은 보지 마시길... 그런데 안 읽으셨다면 읽기를 추천합니다), 사실 나는 그런 상처를 남기는 사랑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내가 하는 것도, 남이 하는 것도). 누구나 아프기 싫은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교통사고가 더 치명적이고 덜 치명적인지, 사고가 나기 전에는 모르는 것처럼 어떤 사랑이 그런 상처를 남기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로부터 그런 아물지 않는 상처가 생기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은 정말 위험한 것이다. 빠지기도 어렵고, 상대와 함께 빠지기는 더 어렵지만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해서 사랑이 시작된 이후가 진짜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현재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안전한 것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얘기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유죄!' 같은, 마케팅 슬로건 류의 조언을 남기는 이들은 아마 사랑을 광범위하게 정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호기심까지 포함하는 범주로. 진짜 사랑은 정말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엘리오와 여름 손님의 사랑이 제법 큰, 그러나 단단히 아물어 소년의 성장의 뿌리가 되는 그런 상흔을 남기게 되리라 믿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건 기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답고, 특히 여름이라는 계절은 잔망스러울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구석이 있어서 절대 밍숭맹숭한 마무리는 아닐 거라는 게 처음부터 눈에 보였다. 상처가 남는 사랑이되, 너무 옅게 남는다면 허무할 것 같았다. 또 그렇게 가벼운 건 엘리오처럼 속 깊은 아이에게 어울리는 사랑의 방식이 아닐 것 같고. 

하지만 오산이었다. 왜 성장소설이라 착각했던 걸까. 소년과 젊은이의 사랑, 여름, 이런 키워드 때문에? 흔적 따위가 아니라 계속 벌어진 채인 상처는 너무 슬프다. 하지만 엘리오는 지나치게 탁월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보통내기는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아버지는 이 모든 걸 예언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엘리오지, 여름 손님은 아니다. '엘리오의 눈을 통해 본 여름 손님'은 알 수 있다. 엘리오가 고른 사람이니까 괜찮을 거라는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색이 다채롭고 고운 엘리오의 필터를 거쳤기 때문에 실제 그가 엘리오의 눈에 보이는 것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내게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엘리오였고, 또 유일하게 매력적인 것도 엘리오였다. 

가장 기억에 남은 말. Amor, ch'a nullo amato amar perdona(t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
그리고 Cor cordium. 

아아... 예쁘다. 결이 곱고 예쁘다. 한 두세 달 휴가를 내고 작가처럼 투스카니나 움브리아 지방에 살면서 이 책을 닮은 책만 한 열두어 권 읽고 싶다.  
by renoa | 2018/06/04 05:21 | review。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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