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핑 위드 아더 피플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진심을 우정인 척 애써 감추고, 직진했다면 바로 만났을 인연을 굽이굽이 돌아 만난다는 스토리는 할리우드 로코가 사랑하는 메인 플롯 중 하나다. 아예 이런 내용의 영화만 모아서 로코 하위 장르를 하나 만들어도 될 정도인데, 예컨대 <러브, 로지>나 <프렌즈 위드 베네핏>, <친구와 연인사이> 같은 영화가 이 분류에 들어간다. 열거가 의미 없을 정도로 이런 소재는 엄청 많다. 둘이 사귀지 않는 이유도 서로 타이밍이 어긋났다는 설정에서 우정을 깨뜨리기 싫어서, 애인 만들기 부담스러워서(회피형 인간)까지 다양하다.

<Sleeping w/ other people>도 해당 장르 영화 중 하나다. 그저 그뿐이라면 진부하기 짝이 없고 기껏해야 두 주인공이 호연을 펼치는 것 외에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을 구석이 없었을 텐데, 나름의 베리에이션이 있었다. 여주가 '나쁜 남자'에게 10년 넘게 시달려 온 여자라는 것.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배우 오륭이 짜증나는 구남친 이규민 연기를 기막히게 해냈지만, 그 캐릭터는 찌질한 캐릭터였지 나쁜 캐릭터는 아니었다. 여자에게 나쁜 남자라는 건, 나를 성질나게 만드는 사람보다는 심장을 쿵 내려앉게 하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너무 좋아서 심장이 쿵 소리나게 내려앉고, 나에게 올 것 같아서 한층 더 내려앉고, 그럼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택하지 않아서 콰직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앉게 하는 - 여기서 짜증도 좀 나긴 한다. 선택하지 않을 거라면 애초에 왜 그 수많은 시그널을  보낸 거람? 하지만 보통 심장이 너무 아파서 짜증나는지조차 잘 감지하지 못하게 되는 - 그런 남자 말이다. 

일레인(레이니) 역을 맡은 앨리슨 브리와 그녀의 몸만 10년 넘게 취하는 나쁜 남자 매튜 역의 애덤 스콧은 '호구 여자 - 나쁜 남자'의 페어를 잘 보여주는 조합이다. 구구절절 설명할 것 없이, 이들의 비주얼과 톤앤매너를 보여주기만 하면 '나쁜 남자에게 걸린 불쌍한 여자가 청춘 망치는 기제'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애덤 스콧은 못생기지도,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은 남자로 나온다. 나쁜 남자는 그리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묘한 매력이 있다. 더 알아가고 싶은 미스테리어스한 느낌을 주는 케이스도 많다. 매튜는 딱 그러한 스테레오타입에 들어맞는다. 레이니는 예쁘고 똑부러진 타입이지만 꽤 많은 똘똘한 여자가 그렇듯 허당끼가 있다. 몸도 맘도 왜 그렇게 가녀린지. 바보처럼 옛 남자를 떼어내지 못해도 아련하고 슬프기만 하다.

그런 레이니가 기적처럼 (쌍방) 첫경험의 상대를 만나 악몽에서 겨우 벗어나고,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다. 

레이니의 사연이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던 반면 남주 제이크(제이슨 서디키스 역)는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왜 바람둥이가 되었는지 배경 설명도 부족하다(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은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바람둥이가 되곤 하니까). 서디키스는 굉장히 유쾌하면서도 진중한 역을 잘 소화해 내지만 약간 추가 여주 쪽으로 기울었다는 느낌? (이건 여주만 취향이고, 남주는 그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저스틴 팀버레이크나 애쉬튼 커처 정도가 나와야 평형이 맞는다는 느낌이 나려나...) 

건강하지 못한 관계는 빨리 끊는 게 답이다. 윤리적인 지적을 하려는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사회 통념으로 받아들여지는 윤리 의식은 거의 없는 편이라 생각한다. 나를 해치는 관계가 건강하지 못한 관계다. 남들 보기에 아무리 그럴싸하고, 번쩍번쩍 빛이 나도 '나'를 좀먹는 관계는 건강치 못한 관계고, 여기저기서 손가락질을 받아도 내가 행복하면 건강한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후자의 경우가 성립하긴 쉽지 않다. 욕먹는 관계가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 음울한 관계를 빨리 끊고 싶어하지 않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 매튜처럼. 들키지만 않으면 즐기는 건 짜릿하니까. 당하는 레이니 입장에서는 눈물을 달고 살 일이다. 왜 이 녀석이 세상 나쁘다는 걸 개새끼라는 걸 알면서도 떼내지 못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내가 세컨이라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마음을 접을 수 없는 걸까? 내가 그/그녀에게 소모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헤로인 중독자처럼 계속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를 찾는 걸까? 이런 마음 아픈 짝사랑을 수 년에서 십수 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하는 걸까?

데이트 관련 앱을 만드는 회사의 대표가(*데이팅 앱 아님) 약 2년 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저에게 관심 없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제가 좋아한 사람은 다 저를 좋아했어요." 놀라운 얘기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여기서 그는 스스로가 "인기가 많다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했다. 자기 자랑으로 비춰질까봐 걱정됐나 보다. "짝사랑이라는 건 상대방이 충분히 시그널을 보내지 않았는데 나는 120% 시그널을 보내는 상황이라는 거잖아요. 상대방 쪽에서 시그널을 아예 안 보낸다고 생각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닥 좋아지지가 않아요.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니 좋아지는 거죠. 그러면 상대방이 보내지 않은 시그널을 나는 확대해석했다는 건데- 그건 시그널 해석을 잘못한 게 문제죠. 그런 오류를 최소화하면 나를 좋아할 사람만 좋아하는 게 가능해져요."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처럼 전문가의 영역에서 시그널 분석을 하긴 어려울지 몰라도, 적어도 '발 뻗고 누울 자리'가 어딘지 정도는 알아야 내가 상처를 최소한으로 받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마음에도 없으면서 시그널 뿜뿜 날리는 놈/년들은 진짜 나쁜 거고. 매튜 소버칙처럼 말이다. (이쯤해서 나는 의도적으로 그런 적이 없었나 돌이켜보고 반성하게 된다)

딴 얘기지만, 첫경험 상대는 착해야 제맛이다. 착한 첫경험 상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큰 선물을 받은 듯. 물론 첫경험 상대가 거지 같았더라도 위로받기를. 인생의 어떤 일들은 어떤 형태로든 일어나야 하는 일들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일은 반드시 더 좋은 나를 만들어 줄 테니까.

세상 예쁜 Alison Brie

아만다 피트찡은 주연급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애매한 역할로 '소모'되었다... 


  

by renoa | 2018/06/10 14:42 | review。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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